베트남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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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 7. 20.

    by. 베트남 사상가

    목차

      틱낫한과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형성되었음에도, 침묵과 책임이라는 단어 아래에서 사회적 존재의 윤리적 조건을 되묻는 데 도달한다. 두 사상가의 사유는 20세기 전쟁과 억압, 망명과 저항의 시간을 통과하며 언어 이전의 윤리와 침묵 이후의 책임이라는 구절을 중심에 둔다. 한쪽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멈춤’이라는 비폭력의 기호를 세웠고, 다른 한쪽은 전체주의에 대한 철학적 응시를 통해 ‘말하지 않음의 죄’를 폭로했다. 이러한 두 철학의 접점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집단 책임 회피, 정치적 무관심과 같은 현대의 문제들을 통과하며 다시 호출되고 있다. 특히, 틱낫한의 침묵은 존재를 성찰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했고, 아렌트의 침묵은 행위의 부재를 비판하는 틀로 기능하며, 둘의 대비는 오늘날의 정치 윤리에서 매우 실천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침묵의 개념이 지닌 맥락: 틱낫한과 한나 아렌트의 근본 차이

      틱낫한이 수행을 통해 전하는 침묵은 내면과의 만남을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그는 침묵을 단절이 아닌 연결의 시작점으로 본다. 호흡을 인식하고 말의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그의 방식은, 타인과의 진정한 접촉이 오히려 침묵 안에서 출발한다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구체적 역사와 연결된 그의 사유는,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분노로 대응하지 않는 비폭력의 방식 속에서 침묵을 가장 강력한 목소리로 활용했다. 이는 말이 많을수록 설득력이 강해진다고 여기는 서구적 커뮤니케이션 모델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반면, 한나 아렌트에게 침묵은 위기이며, 정치적 퇴행의 전조로 간주된다.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을 부정한 사회 분위기를 목격하며, "말하지 않는 것"과 "생각하지 않는 것"이 동일한 위험성을 지닌다고 진단했다. 그녀에게 침묵은 존재의 윤리적 책임을 유예하는 방식이며, 그 자체로 악의 구조에 편입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 재판을 관찰한 기록에서 “악의 평범성”을 언급한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즉, 틱낫한이 침묵을 내면 회복의 장소로 보았다면, 아렌트는 그것을 집단 무책임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틱낫한의 침묵과 아렌트의 책임이 교차하는 지점

      두 철학자의 관점은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특정 조건 아래에서는 교차한다. 틱낫한은 침묵을 단순한 자기 치유의 수단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을 통해 고통받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이 곧 연민의 출발점이자 비폭력의 실천이라는 확장된 윤리로 나아간다. 즉, 침묵은 자기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감수성을 일깨우는 매개가 된다. 이는 언뜻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침묵을 통해 권력과 대면하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임 개념과의 교차가 일어난다. 아렌트는 ‘말하지 않음’이 곧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 보았지만, 틱낫한의 침묵이 오히려 타인에 대한 감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침묵은 ‘정치적 책임의 감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틱낫한이 미국에서 행한 연설과 저술 활동은 침묵을 넘어서 ‘행동으로서의 침묵’을 의미했고, 이는 아렌트의 사유에서도 중시되는 ‘행동과 판단’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 두 사상은 표현 방식은 달라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둘러싼 공통된 질문으로 회귀한다.

       

      디지털 시대, 침묵의 의미가 새롭게 재편되는 구조

      오늘날 디지털 환경은 말의 과잉과 침묵의 실종을 동시에 초래한다. 댓글과 공유, 실시간 반응이 일상이 된 SNS에서는 말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이 구조에서 틱낫한의 침묵은 반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작동한다. 침묵은 디지털 피로와 정보 과잉을 해독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단순한 무응답이 아닌 ‘선택적 비참여’의 의미로 확장된다. 특히, 해시태그 운동과 같이 목소리를 내는 구조가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말하지 않는 저항은 역설적으로 더 강력한 발화로 기능한다.

      한편, 아렌트의 관점에서 디지털 침묵은 경계해야 할 여지가 있다. 알고리즘에 의해 강화되는 집단 침묵, 예컨대 특정 이슈에 대한 공론 부재나 ‘침묵하는 다수’는 여전히 아렌트가 비판했던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SNS에서의 침묵은 때로는 책임 회피의 알리바이로 기능하며, 침묵을 가장한 방관이 확산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현대 디지털 공간에서 침묵은 하나의 선택지가 아닌 해석 가능한 정치 행위로 변모하고 있으며, 두 사상가의 철학은 이 변화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언어와 행위의 관계: 틱낫한과 아렌트 철학의 실천 방식

      언어와 행위를 분리하지 않는 틱낫한의 수행 방식은,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이 있는 언어라는 통찰에서 출발한다. 그는 언어를 수단이 아닌 실천의 일부로 보았으며, 말 한마디조차 고통을 줄이거나 키우는 행위라고 보았다. 침묵 속에서 자각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응답이 되며, 이는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말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으로 작동한다. 그의 수행 공간이 조용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침묵은 전혀 비정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향한 윤리적 준비 상태다.

      반면, 한나 아렌트는 언어를 정치의 중심에 놓는다. 그녀에게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며, 언어는 정치적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다. 공동체 내에서 발화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셈이며, 이는 정치적 소멸로 이어진다. 이 관점에서 아렌트는 말하지 않음 자체보다 ‘책임 회피로서의 침묵’을 비판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틱낫한의 철학처럼 침묵이 자각된 상태로 유지되고, 이를 통해 공동체에 대한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아렌트가 말한 ‘책임의 정치학’과 충돌보다는 조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읽힌다.

      틱낫한과 한나 아렌트: 침묵과 책임의 철학 비교

      침묵과 책임을 둘러싼 철학이 오늘의 시민에게 남기는 과제

      현대 사회는 침묵을 ‘회피’로, 책임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틱낫한과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이러한 이분법을 흔든다. 침묵이 반드시 무책임을 의미하지 않으며, 책임은 단순한 제도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라는 점을 두 사람은 각각의 방식으로 말해왔다. 틱낫한은 침묵을 통해 감정적 폭력과 충동적 반응을 가라앉히는 길을 제시했고, 아렌트는 정치 공간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핵심이라 강조했다.

      두 사상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인간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침묵은 결국 자기를 비워 타인을 맞이하는 행위이며, 책임은 타인 앞에 스스로를 내보이는 행위다. 그 접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침묵할 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리고 발화할 때 우리는 누구를 위해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디지털 기술, 집단 정치, 소셜미디어라는 현대적 조건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며, 틱낫한과 아렌트가 남긴 사유의 언어는 그 질문을 지금 이곳에 되살려낸다.